사람들은 묻는다. 음반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난관에 봉착한다. 말이 싫어 선택한 노래를 말로 설명해야 하는. 말로 할 수 있었더라면 노래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묻는다. 작품을 통해 무얼 이루고 싶은지. 그들에게 예술이란 방탈출 게임과 같은 것이다. 열쇠를 얻어 금고를 연다. 금고에 있는 열쇠로 방문을 연다. 방안에 있는 열쇠로 금고를 연다. 그들은 예술을 어떤 스테이지로 옮겨가기 위한 도구처럼 취급한다. 음반 소개는 언제나 괴롭다.
음악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프로듀서는 음악이 잘 팔리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그건 ― '스티븐 연처럼 생기고 싶다'나, '복권에 당첨됐으면 좋겠다' 같은 ― 막연하고 가벼운 바람이다. 백 퍼센트의 마음을 쏟지 않는. 팔리면 좋겠지만, 팔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는 않는다. 음악의 주변을 대하는 자세도 비슷하다. 상을 타면 좋겠지만, 상을 타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
이천육년 봄, 사회학개론 시간이었다. 교수는 책상과 책상 사이 좁은 틈에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돈과 자본의 차이는 뭘까? 침묵을 싫어하는 이들의 농 같은 대답이 울렸다. 고개를 젓다 지친 교수는 정답을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한 돈.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자본이 없다. "단순 상품유통은 판매로 시작해서 구매로 끝나며,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유통은 구매로 시작해서 판매로 끝난다." 《김일성이 죽던 해》와 노동력, 긴 미래를 팔아 《수몰》을 샀다. 자족과 함께 과정은 종료 된다.
다른 차원에서도 음반은 도구가 아닌 결과다. 곡 쓰기는 실상, 내가 그렇게까지 쓸모 없진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을 볼 수 있고 남들과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작업이다. 생명 연장의 비계를 설치하는 시도이다. 그래서 이년 전과 마찬가지로. 목표는 여전히 음악을 내는 것, 좀 더 바라는 것이 혹여나 허락된다면, 좋은 음악을 내는 것이다.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음악을 완성한 후에야 비로소 내가 ― 혹은 사회가 ―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발견하곤 한다. '분하고 더러운 팝', 음악적 비전을 설명해야 할 때마다 멋쩍게 쓰곤 하는 말이다. 팝을 듣는 데는 길잡이가 필요치 않다. 팝은 모든 장르를 흡수하는 유연한 태도이며, 원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든 팝에서 분하고 더러운 것들을 찾아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바라는 것은 ― 기대가 주곤 하는 패배감 때문에 언제나 '내심' 바란다 ― 또 있다. 체크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시간이 연장 되는 레이싱 게임처럼, 『수몰』이 내 음악적 자아의 생명을 연장시키길 바란다. 떠안아야 했던 것을 내려놓길 바란다. 이후를 생각할 수 있길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론 『수몰』이 유작이길 바란다. 더 나아간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끝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확신이든 포기든, 스스로의 가치를 자문하는 일은 이제 멈춰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