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매우 자주 "음악가", "아티스트", "뮤지션", "싱어송라이터"로 소개 되지만, 일일히 교정하기 귀찮고 번거로워 첨언하지 않지만, 때로는 나조차도 스스로를 '음악가'라 말하지만, 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동호인이 뛰는 인조잔디 운동장에도 축구는 존재한다. 그곳에도 규칙, 전술, 승패, 열정, 환희와 절망, 관람의 재미가 있다. 그들이 하는 것은 명백히 축구지만 그들 모두가 선수라 불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것은 음악이지만, 나는 음악가가 아니다. **

음악을 만드는 비음악가가 존재할 수있다면, 비음악을 만드는 음악가 역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예술가 대부분은 어느 시절에 만들어 낸 예술을 통해 권위 ―상징적인 동시에 물리적인 ― 또는 자리를 획득하고 예술의 형식을 갖춘 비예술의 생산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술가로 여겨진다.

그렇게 봤을 때 음악가와 비음악가를 나누는 것은 그들이 생산해 낸 것들이 지닌 속성 ― 그것이 음악이냐 아니냐 ― 보다는 그것을 만들기 까지의 과정이다. 나는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숙련', ― 타당도가 아닌 ― '신뢰도', 공정과 예측가능한 결과에 대한 '장악력'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끝내 음악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음악가'를 말할 때 내가 항상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무 숫자도 붙지 않은 C코드를 몇시간 째 치는 허성욱 씨의 모습이다. 사장님은 그 쉬운 C를 몇 시간씩 치는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장님과 나는 부스가 아닌 조정실에서 만난 것 아닐까.

* 할머니의 예시
**모두가 '크리에이터'가 되는 시대에 공표란 무의미하다. 나의 음반은 단편선 씨에게 만큼이나 기술과 시대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만일 여전히 음반이란 흥업에 종사하는 악당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면, 나의 음악들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