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선 나를 포기했다. 서울로 대학을 가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자식새끼는 가산을 좀 먹는 무엇이 되었다. 한동안 공무원 시험을 권했던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빠는 언제부턴가 "믿는다"는 문자를 보낸다.* 내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은 조카들뿐이다. 차는 언제 살거며, 결혼은 언제 할거며, TV에는 언제 나오는지. 나는 11살짜리 꼬마와의 전화 통화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삼촌은 글렀어. 너희 아빠가 잘되기를 같이 기도해보자."

집에서 생각한 무엇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 6월 말부터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 여전히 스스로는 음악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 시작하였다. 특별한 것은 없다. 11월까지는 확실히 그랬고 11월 이후에도 대개 그렇다. 2주에 한번 꼴로 공연을 한다. 공연이 있는 주는 마음이 바쁘다. 바쁘기와 공연의 질은 비례하지 않고 그게 마음을 더욱 바쁘게 한다. 친구들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명절에도, 연말에도. 친구들은 평일에 일하고 나는 주말에 일하니까.

11월이 기준인 것은, 서울레코드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페어에서 최초로 공개한 LP는 걱정과 다르게 금방 매진되었다. 인스타그램 친구가 많이 늘었다. '프레드 페리'에서 의상을 협찬받았다. 페어가 끝난 다음 날 4개의 공연 섭외가 들어왔다. LP를 추가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락세에 있던 CD 판매량도 덩달아 올랐다. 나나 내 음악은, "최초"나 "한정" 같은 말들, 혹은 "140g 클리어 그린 디스크" 아래로 숨어버렸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좋은 상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러 곡을 썼다. 발표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윤동주 씨의 시로 노래를 썼다. 종로구에서 주최한 윤동주 창작가요제에 냈지만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컴필레이션 음반 《모두의 동요》에 수록하기 위해 두 곡을 썼다. 그중 하나가 11월에 발표된 〈사골〉이다. 한 단체에서 주최한 음악극을 위해 8개의 곡을 썼다. 여러 이유로 1집에 싣지 못했던 두 곡을 묶어 싱글로 내게 되었다. 〈중학생〉과 〈분더바〉, 이 글은 바로 그 싱글의 프로모션을 위해 쓰인 것이다.

음악으로는 큰돈을 벌지 못했다. 음원과 음반 판매로 매월 20만 원 정도가 들어왔다. LP를 제작하며 장당 3,000원씩 200장, 총 60만 원을 받았다. 레코드페어에서 노래하고 25만 원 가량의 보수를 받았다. '서울, 주파수'에서 노래하고 25만 원을 받았다. 공연 끝나고 정산한 티켓 판매수익은 -10만 원을 넘은 적이 없다 - 대부분 그날 술값이나 택시비로 사용했다. 야심 차게 기획한 공연은 관객이 들지 않아 적자를 봤고 돈을 물어야 했다. 나를 "가수님" 이나 "대가수"라고 불러주는 친구들은 내가 밥값은 하는 줄 알지만 구체적인 액수를 말해주면 언제나 놀란다.

음악으로 많은 돈이 나갔다. 이번 싱글 제작에는 약 200만 원이, 사골의 제작에는 약 40만 원이 들었다. 지난 음반처럼 모두가 부족한 보수로, 혹은 무보수로 제작을 도와줬다. 다른 일로 벌충한 돈을 모두 이곳에 썼다. 자전거를 팔아서, 스캐너를 팔아서, 만화책을 팔아서 음반을 만들었다. 오래 지속할 수는 없는 방식의 활동이다. 국가기관에서 하는 사업에 지원했으나 결과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안 될 것이고, 새 음악의 발표는 당분간 보류될 것이다.

중단한 논문을 다시 붙잡아 볼까? - 우스워서 말을 안 했지만 내 논문의 주제는 '예술인 빈곤의 재생산'이다 - 학위를 먼저 따고 나간 친구는 유튜버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올 초에는 농사를 지을 거라 했었는데. '요팟시'를 들었다는 지도교수**는 "네가 논문 못 쓰는 게 네 탓이지, 내 탓이냐?"며 나를 때렸다. 옆에 있던 다른 교수는 음반을 냈다는 나의 근황을 전해 듣곤 "그래, 용성아. 학위 안 따도 돼"라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 알 수가 없다.

*닳아 가는 믿음을 되살려 보려는 것일까
**바이브를 위해 "-님"을 생략했습니다. 봐주세요,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