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는 운동부 학생의 모습을 담고 싶어 했다. 대학 후배에게 부탁해 청주의 한 탁구부를 섭외했다. 촬영 하루 전 사정이 생겨 로케이션이 취소되었다. 발매가 며칠 안 남은 때였다. 뮤직비디오를 찍을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없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의 입장. '그래도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프로듀서의 입장. '알아서 하기로' 하고 배우 모집 공고를 올렸다.

나는 항상 뮤직비디오가, 드는 품에 비해 소득이 적다고 생각해왔다. 터무니없이 적게 잡아도 최소 50만 원 이상의 노동 ― 비용이 아니다 ― 이 투여 된다. 5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렇지만 50만 원으로는 TV에서 흔히 보는, 별 대단할 것도 없는 뮤직비디오조차 만들기 어렵다. 널리 알려진 해결책은, 사람을 갈아 넣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대단한 영상을 만든들, 내게 큰 변화가 찾아올까? 전혀 아니다.

품과 소득의 비율을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맞추고 싶었다. 관건은 최대한 적은 컷을 짧은 시간 동안 촬영하는 데 있었다. 중학생이 걷는 모습을 3(내지 5)회 찍자. 아침엔 일어나기 힘드니까 오후에 찍자. 5시면 해가 지니까 3시쯤 찍자. 어두워지면 적당히 마치자. 원하는 그림을 찾아 감독에게 보내줬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 씨가 걷는 모습이었다. 영화에서는 몇 초지만 우리는 7분 동안 걷기로 했다. 원테이크에 가까워질수록 편집이 줄어드니까.

1월 2일, 12시 반쯤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감독을 만났다. 차를 대고 장소를 물색했다. 청운중학교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의 언덕길이 가장 좋았다. 구도와 비율, 시작과 끝을 정했다. 2시 반쯤 이번 뮤직비디오의 주연배우인 이슬 씨를 만났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이슬 씨는 촬영을 위해 아산에서 어머님과 함께 올라왔다. 3시쯤 사진작가 겸 디자이너인 소라 씨를 만났다. 소라 씨의 작업에 '좋아요'만 열심히 누르다, 이번에 용기 내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

이슬 씨는 검은 더플코트를 입고 왔다. 옷장에도 없고 주변에서도 찾기 힘들다하여 직접 구입해 보냈다. 소라 씨가 챙겨온 파란 목도리와 백팩을 멨다.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몇 번의 예행연습을 했다. 주머니의 손 꽂는 모양을 교정했다. 촬영 시작했다. 촬영 끝났다. 인건비를 지급하고 향후 계획을 공유했다. 해산 시각 4시 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담았다. 감독은 나를 "타협하는 음악가"라며 놀렸다. 잘 타협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