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바는 연희동 인근에 있던 카페다. 2014년, 임대차분쟁으로 농성 중인 분더바 앞에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분더바를 함께 되찾기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노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농성장에서 부르기 적당한 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만들면 어떨까? 분더바, 세 글자로. 마음속으로 운만 띄우고 만들지는 못했다.
궁중족발은 통인동 인근에 있던 식당이다. 2018년, 임대차분쟁으로 농성 중인 궁중족발에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현장잡지 맛동산'이 열렸다. 노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농성장에서 부르기 적당한 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만들면 어떨까? 예전에 생각만 했던 노래를. 그렇게 '분더바'가 나왔다.
현장에 있던 단편선 씨 - 그날은 본인의 세례명으로 노래를 했다 - 가 마음에 들어했다. 친한 친구 몇몇도 마음에 들어했다. 1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불렀다. 헬로루키 참가를 앞둔 때였다. 단편선 씨와 합정동에서 ― 간장으로 맛을 내 색이 검었던 ― 라멘을 먹었다. 중학생과 분더바를 묶어 내기로 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프로듀서 단편선 씨를 꽤 오랫동안 존경해왔다. 두리반 투쟁이 한창일 때, 나는 고민 많은 지망생이었다. 현장에서 노래하는 그가 하나의 해답처럼 보였다. 전역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그가 운영위원을 맡고 있던 조합에 가입한 것이다. 단편선 씨의 프로듀싱 아래 현장에서 부르던 노래를 발표하는 것은 그래서 어쩐지, 소설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차고 화가 줄었다. 사실을 아는 것이 귀찮아졌다. 사장이 된 친구들이 ― 그들은 언제나 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 늘었다. 두 번의 재개발로 두 번의 이사를 했다. 분노가 맡아 둔 자리엔 부러움이 들어섰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엔 높은 건물이 들어섰다. "그래도 멋은 있더라", '10년 전의 나'와 착잡함을 나눈다. "이제는 누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역하게 느껴진다.
실은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