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흑석동에 있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선 ― 벗어날 때도 마찬가지로 ― 노량진에서 '(공)일번'을 타거나, 사당에서 '오오이사'를 타거나 용산역에서 '일오일'을 타야 했다. 이 세 곳은 다른 마을이라기 보단 같은 동네의 먼 외곽처럼 느껴졌다.

가장 만만 했던 곳은 노량진이었다. 학교 앞에 지겨울 때, 그렇다고 멀리 가긴 귀찮을 때 종종 찾곤 했다. 거기엔 백화점도 영화관도 없었지만 ― 그래서 데이트 장소로는 영 꽝이었지만 ― 오히려 그런 면이 나쁘지 않았다. 여럿이면 택시가 더 싸기도 했으니까.

가지 않을 때조차 노량진은 언제나 마음 속에 있었다. 다들 노량진 막차 시간을 한켠에 품고 있었으니까. 인천 막차 시간이 오고, 수원 막차 시간이 오고, 구로 막차시간이 오면, 차례대로 친구들을 보냈다. 나는 한동안 타지도 않는 1호선 막차 시간을 외우고 있었다.

학교 앞에 9호선이 놓였다. 그새 우리는 나이가 들었고, 노량진은 좀 더 진지한 이유로 찾는 곳이 되었다. 고향 친구는 경찰이 되겠다며 고시원을 구했다. 친한 선배는 공무원이 되겠다며 학교 대신 학원을 나갔다. 육교가 사라지고. 큰 학원 건물과 관청을 닮은 유리 건물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