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내촬영은 역순으로 진행됐다. 출근 시간이라 엘리베이터를 맘껏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우체통에서 엽서를 찾아 집에 들어온다. 엽서를 놓고 옷을 갈아입는다. 엽서를 들고 소파에 앉는다. 누가 보낸 엽서인지 골똘히 생각한다. 비슷한 글씨를 본 기억이 난다. 오래전 선물 받은 책을 꺼내어 본다. 보낸 이를 특정한다. 책과 엽서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집에 있는 강아지 하리가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적당히 앵글로 들어와서 이쁜 포즈를 취해주면 좋으련만 필요할 때는 밖에 있고 필요 없을 때 안으로 들어왔다. 디졸브로 어떻게든 이어보기로 했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을 찍었다. 구상에는 없던 장면이다. 미리 준비해둔 책이 아니라 소파 옆 협탁에 있던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좋은 책이지만 설정과는 조금 맞지 않았다. 이미 너무 유명해진 책이어서.
산림과학원 근처에 차를 대고 밥을 먹었다. 돌솥밥을 파는 곳이었다. 밥에는 단호박, 콩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이제는 감옥에서도 콩밥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했다. 코다리찜과 김치찌개, 보쌈이 나왔다. 셋 다 형편없었다. 숟가락을 나눌 때 즘 옆 테이블 아저씨가 일어났다. "맛없다. 정말 맛없다"하고 외치면서. 사실로 판명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요거프레소에 앉아 차를 마셨다. 나는 흑당버블티를. 도연이는 밑에는 오레오. 위에는 뭐가 있고 3층에는 크림과 치즈케익이 올라가 있는 매우 폭력적안 음료를 먹었다. 보연씨는 아마도 아메리카노.
산림과학원 앞을 걷고 모습을 찍었다. 지난 일요일 답사 때 미리 봐둔 곳이다. 햇살이 강렬해서 썩 보기 좋게 나오지는 않았다. 촬영일정 상 어쩔 수 없었다. 보연씨가 시내버스를 타는 장면까지 찍었다. 다음 정류장에 내린 보연씨를 픽업해서 청량리역에 갔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모습을 찍었다. 2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아래의 것은 수리 중이었다. 수리 기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찍는지 물었다. 유튜브를 찍는다고 둘러댔다. 유튜브가 있어서 좋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마법이 단어다. 에스컬레이터를 왜 'E/S'로 줄여 쓰는지 도통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번 승강장에 내려왔다. 3시 22분 기차였다.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을 찍었다. 단편선씨와 통화를 했다. 믹스와 마스터링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편선씨는 머쉬룸레코딩스튜디오로 가는 길이라 했다. 열차에 올랐다. 충분한 각이 필요할 것 같아서 특실을 6자리를 예매했다. 4A·B·C와 5A·B·C. 2주 사이에 특실을 두 번이나 타게 되었다. 의자를 돌려 마주 보게 만들어 대각선 방향에서 찍었다. 4A에서 5C를 향해. 보연씨는 좌석에 앉아 편지를 썼다. 중간중간 터널이 많아 촬영이 자주 중단되었다. 만종역에는 예정시간보다 2분 늦은 4시 11분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구 만종역으로 이동했다. 택시 문을 열고 구 만종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그게 어딘지 물어보고, 다음에는 가야지 별 수 있느냐고 푸념했다. 승차거부 하면 신고당한다고. 그래서 서울에는 타다 같은 것이 생긴 것 아니냐며. 미리 검색해보기로는 오백 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큰길을 타고 꽤 멀리 갔다. 뒤에 있던 도연이가 걸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기사는 뭔가 꺼림칙했는지 갓길에 정차하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님, 구 만종역이 어디지?"하고. 그는 동화역과 구 만종역을 헷갈려 했다. 차를 돌려 구 만종역으로 갔다. 그 역시도 순탄치는 않아서 여러번 물어물어서.
구 만종역에 도착했다. 내부에 들어가려 했으나 관계자가 출입을 막았다. 외관도 좋지 않았다. 건물상태는 괜찮았으나 바로 앞 정원의 수풀이 우거져 너무 폐허처럼 보였다. 할 수 없이 동화역으로 가기로 했다. 다시 택시를 불렀다. 알던 길이 사라졌다고 전화가 왔다. 옆에 있는 관계자에게 길 설명을 부탁했다. 대형 세단을 끄는 키가 작은 기사였다. 6분 거리의 택시가 20분쯤 지나서 왔다. 길을 보기 위해 종종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빼 앞을 내려다봤다. 살짝 무서웠다. 동화역은 상태가 좋았다. 적당히 낡았고, 적당히 관리가 되어 있었다.
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버스정류장에서 편지를 쓰는 모습을 찍었다. 시내버스를 보내는 모습을 찍으려고 했는데 버스가 멈추지 않고 통과해버려 찍지를 못했다. 촬영이 빠르게 끝나면 동화역에서 청량리로 가는 17시 36분 무궁화호를 타려고 했으나 시간을 맞추진 못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만종역으로 가서 18시 18분 KTX를 탔다. 특실을 타다 일반실을 타니 답답했다. 청량리에서 내려서 피자와 퀘사디아, 필라프를 먹었다. 낮에 도연이에게 파파존스 더블치즈버거피자 아니면 안 먹겠다고 공언했는데, 몇 시간 만에 변절을 해버렸다. 식사를 하며 한국사회의 불합리와 전근대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보연씨와는 청량리역에서 헤어졌다. 도연이와는 왕십리역에서 헤어졌다. 영상은 다음 주까지 편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