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오래전 멀어진 사람을 만나러 간다. 짐작과 가능성만 어렴풋이 보이다 멀어져 버린 그런 사이다. 휘경동에 있는 친구의 집을 빌렸다. 그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집에서 출발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만종역까지 갔다가 걸음을 돌린다. 둘은 만나지 못한다. 소설과는 다르다.

기차를 타는 것은 지난 일요일에 정했다. 원래는 어딘가를 계속 걸으려고 했으나, 이유와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근처 대학에 들러 추억을 회상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너무 정적이라 폐기하였다. 최초의 구상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가까운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으로 동으로. 촬영감독은 허가 등의 문제로 공공장소 및 대중교통 내 촬영을 꺼렸으나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박보연씨가 여주인공으로 분했다. 필름메이커스에 배우모집공고를 올렸다. 게시 후 10분이 안 되어서 메일함이 가득 차버렸다. 약 200여 통의 지원서가 도착했다. 지원서 하나하나를 허투루 볼 수가 없었다.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개개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가 들어오는 속도나 양 같은 것에서. 3일쯤 지나니 지원이 뜸해졌다. 하루에 절반씩 줄여나갔다. 5월 14일에 최종명단을 발표했다. "박보연씨는, 우리와 함께, 갑니다."

뮤직비디오에는 최승자 시인의 『즐거운 일기』가 등장한다. 평소 시를 즐겨 읽는 단편선씨에게 추천 받은 책이다. "대설주의보의 주인공이 시집을 꼭 하나 읽어야 한다면 무엇이어야 되겠습니까?" 오래전 그가 주인공에게 선물한 책이다. 시집은 84년도에 출간되었다. 둘은, 스무 살 때 만났다고 가정한다면, 65년생일 수도 있겠다.

두 개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그가 주인공에게 남긴 것. "상세불명한 이유들로 얼마간 곧 멀어질 것입니다. / 너무 지나간 날 어제는 상상도 못 한 / 늙고 굽은 마음으로 겨우 마주한대도 / 시간은 고무처럼 장난이라 여기며 / 크고 작은 이유들로 망설였던 마음을 / 농에 얹어 따라내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그에게 남길 것. "우리 매번 찾던 곳엔/새 다리 놓였지만/가는 길은 예전보다/먼 것만 같습니다.//늦가을 첫눈처럼/설레던 당신의 문자/잊은 듯했을 때/기쁜 속마음//긴 의자에 올려두고/나는 갑니다"

촬영상의 문제로 책의 제목도, 편지의 내용도 크게 담기지는 않았다. 살짝 아쉽지만 촬영 감독의 결정에 따를 일이다. 사공이 많지 않아도 배는 산으로 간다. 대개 사공은 한 명인 것이 가장 낫다. 확신 없는 의견이 섞이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나오기 마련이다. 1회차는 나의 의도대로 촬영했으니 2회차는 촬영 감독의 의도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보연씨가, 자신이 찾아가는 남자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었다. 정해 놓은 게 없었다. 놈팽이류의 인간일 거라고는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십여 년 전 멀어진 사람에게 그렇게 떨렁 편지를 보내는 짓을 하는 것을 보라. 질이 좋지만은 않은 인간임이 분명하다. 못된 것도 아니고 폭력적인 것도 아닌데, 오히려 착하기까지 한데 질이 좋지 않은, 그런 녀석일 것이다. 그치만 각자 상상하기로 했다. 극 중에서 모르는 것은 실제로도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시계를 주문했다. 처음엔 조금 고급스러운 가죽 시계를 생각했으나 예산상의 이유로 2안을 선택했다. 카시오에서 나온 "LQ-142-7E"라는 모델로 네이버쇼핑에서 약 1만원 가량에 구매할 수 있다. "여학생용 시계"가 연관검색어로 나오는 그런 시계다. 시계가 의미하는 것은 따로 없었다. 주인공은 시계를 차는 종류의 인간이어야 했을 뿐이다. 저렴하면서도 신뢰 있는 제품을.

아침 8시에 휘경동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6시에 기상하여 6시 20분쯤 나왔다. 지하철에서 조느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하 동역문)까지 가버렸다. 원래는 종로3가(이하 종3)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동역문-동대문-회기로 가는 코스가 나을까 동역문-종3-회기로 가는 코스가 나을까? 나는 별생각 없이 후자를 택했다.

내가 제일 먼저 집에 도착했고 보연씨가 도착했다. 집주인이 출근한 후에 도연이가 도착했다. 벽에 붙은 결혼사진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