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40분에 일어나 7시 10분쯤 집에서 나왔다.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진주행 8시 25분 기차를 타고 오송역에서 내릴 계획이었다. 빠리크라상에 들러 샌드위치 두 개를 샀다. 열차는 9번 승강장에서 대기중이었다. 기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도연이가 보였다. 열차에 탑승해 서로가 가져온 빵들을 나눠 먹으며, 촬영계획을 세웠다. 특실은 처음이었다. 무릎이 닿지 않아 좋았다. 앞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반쯤 돌려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안 형의 소렌토에 짐을 싣고 영덕을 향해 출발했다. 문의 개폐를 감지하는 센서가 이상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주행 중 계속 경고음이 울렸다. 내가 앉은 조수석 쪽이 문제였다. 혹시나 해서 문을 당겨봤더니 소리가 멈췄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충격에도 경보가 다시 울렸다. 차에서 한숨 자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교량의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문을 당겨야 했다. 주유 차 들린 휴게소에서 문을 수리했다. 유난히 헐거워 보이는 나사 하나를 힘껏 조였더니 소리가 멈췄다.
영덕에는 안 형의 외가-하우스가 있었다. 경북 문화재로 지정된 '물소와고택'이라는 이름의 조선 시대의 고가이다. 안 형의 말로는, 영덕 어디에서든 택시를 타고 영해 큰 집(또는 호지마을 큰 집)에 가자 하면 이곳에 온다고 했다. 안 형의 집 외에도 한옥이 수십 채가 더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화재 당국의 관리·감독 없이는 개·보수가 불가하여 요즘 사람이 살기에는 꽤나 불편한 점이 많다고 했다. 관리가 되지 않아 낡은 그 점이 나는 특히 좋았다.
니스 바른 식탁처럼 노랗게 떠 있는 한옥도 싫고 갓 칠한 단청의 짠 빛도 싫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래서 영덕으로 왔다. 좁게 둘린 담 떄문에 카메라 위치 잡기가 쉽지 않았다. 안 형은 이 집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주에 있는 자신의 이모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곳은 펜션으로 이용하는 한옥이라고. 안 형이 새삼 높아 보였다. 모두들 제 조상이 양반이라고 말하는 이 시대에, 진짜 양반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도연이는 해가 너무 높아 당장 촬영은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뭐라도 먹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닷가에서 물회 세 개를 주문했다. 안 형은 물회 하나를 멍게비빔밥으로 바꾸려 하다가 내가 멍게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곤 주문을 유지했다. 매운탕과 밥이 먼저 나오고, 조금 이따 물회가 나왔다. 속초에서 먹었던 것이랑은 모양이 달랐다. 고추장을 한 술 넣어 비벼 먹었다. 밥을 먹으며, 모교와 모과의 과거-현재-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핌 입자 없이도 우리는.
아마도 세시쯤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사랑채 앞에서 기타를 치기로 했다. 구도와 자세를 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놓아도 흉물스럽달까. 반바지를 입고 온 것을 살짝 후회했다. 중간중간 비가 와서 촬영을 멈추기도 했다. 서서-앉아서, 노래하고-안 하고. 투바이투의 영상을 찍었다. 해 질 녘 즈음 촬영이 끝났다. 촬영 내내 들렸던 풍경소리가 무척 아름다웠다.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많이 왔다. 안동휴게소에서 소고기국밥을 먹었다. 안 형은 라면 정식을 먹었다. 옛날 이야기를 실컷 했다. 핌 입자 없이도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