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C(Officer Basic Course)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기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워 있으면 허리가 들릴 정도였어요. 39도가 넘는 열이 났습니다. 생활관 2층 침대에 누워 종일 잤습니다. 모든 평가가 끝난 시기였기 때문에 수업에 빠져도 별 무리가 없었죠. 지도장교는 꾀병을 의심했습니다. 별것 아닌데 아픈 척하는 것 아니냐, 나도 열나는데 일하고 있다, 같은 말을 하면서요. 동기들이 약을 갖다줬습니다. "내가 써봤는데 이 약이 좋더라." 먹어도 별 차도는 없었습니다. 외진을 신청했습니다. 외진 또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단 의무대에 하루 입원을 하고 다음 날 통원버스를 타야 했죠. 그렇게 열이 나고 삼 일쯤 됐을 때, 처음 병원을 갔습니다.

줄이 길었습니다. 사정을 아니까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두 시간쯤 후에 첫 진료를 받았습니다. 혈액검사부터 해보자. 그 후로부턴 모든 게 빠르고 좋았습니다. 군의관은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간호장교는 저에 대한 모든 일을 급하게 처리해줬어요. 부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도장교님, 저 입원 해야 한다고 합니다." 부대에선 화를 냈습니다. 저는 자대 배치가 예정되어 있었고, ○월 ○일 부로 소속을 변경하겠다는 명령이 이미 나 있는 상태였거든요. 그걸 바꾸는 게 싫었던 것이죠. 지금 입원을 하면 수료를 못 하고, 1년 뒤 재입교를 해야 한다는 거짓말을 하더군요. 듣다 못 한 군의관이 전화를 뺏었습니다. "입원 안 하면 천 소위 죽어요."

중환자실에 며칠 있었습니다.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어요. 정확한 병명도 없었습니다. 더 큰 병원으로 후송을 가야 했습니다. 부대에서는 지금이라도 복귀를 하면 수료를 할 수 있다. 일단 복귀를 해서 수료를 하고, 일반 병원을 가는 게 좋지 않겠냐 권유했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도움으로 무사히 후송되었습니다. 분당에서 약 한 달을 보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2주, 일반 병실에서 2주. 남아공 월드컵은 중환자실에서 봤습니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는 나쁘지 않았어요.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문안 올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다들 돈을 못 벌 때라, 오면 피자 같은 것을 사 먹여 보냈어요. 몸무게는 72킬로까지 빠졌습니다.

퇴원 후 포병학교로 복귀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보다 한 달 정도 늦게 자대로 갔습니다. 빈 학교는 평화로웠어요. 지도장교들과도 웃으며 지냈습니다. 너 때문에 시말서를 썼다며 너스레를 떨더군요. 그가 시말서 쓸 일이 없었다면 저는 죽었겠지요.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 아는 것 별로 없는, 고작해야 저보다 한두 해 먼저 들어온 사람이었을 뿐이니까. 저를 죽이려 했던 건 그 사람 너머에 있는 무엇이었습니다. 관료주의, 조직, 페이퍼 워크, 무지, 미래에 대한 불안, 진급을 향한 욕심 같은 것들.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치료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결론은 뻔합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변했습니다. 평소 성격에 맞춰 부적Negative으로요. "하고 싶은 걸 하자"가 아닌 "하기 싫은 걸 하지는 말자"는 식으로요. 뮤지션,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아티스트. 무어라 부르던 지금 제 삶은, 그때 시작된 것 같습니다.

*나라경제 8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