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폐렴에 걸렸다. 일요일부터 열이 났다. 병원에서 준 약을 먹어도 그떄만 열이 내릴 뿐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요일 밤 CT를 찍고 폐렴 진단을 받았다. 해당 병원의 입원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음 날 다른 병원에 입원했다. 나랑 같이 사는 친구는 누군가 폐렴에 걸렸단 얘기를 딱 두 번 들었는데, 하나가 나고 다른 하나가 우리 엄마라고 한다.

엄마의 지시를 따라 이천에 왔다. 할 게 많아서 노트북을 챙겨왔다. 노트북 키보드도, 작은 모니터도 익숙지 않다. 서울집에서 일할 떄 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김일성이 죽던 해〉 노래들을 보정했다. 얼른 작업해서 학주씨에게 보내줘야 했다. 직접 만난 엄마는 통화에서처럼 씩씩했다. 열이 있고, 기침을 하는 것 뺴고는 괜찮다고 했다. 남 걱정을 할 힘이 남아 있었다. 엄마 차를 끌고 나와 심부름을 했다. 운전은 2년 만이었다.

서울라이브에 떨어졌다. 이천에 내려오는 길에 단편선씨한테 전해 들었다. 나를 가리켜 쓴 듯한 심사평이 있었다. 탈락은 언제나 좋지 않다. 세상 쓸데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떨어질 떄의 기분이 싫어서, 어디에도 지원하고 싶지가 않다. 그치만 되지 않은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됐으면 오히려, 너무 잘 되어가는 것만 같아 불안했을 것이다. 사격할 떄처럼. 나는 한 번도 20발을 모두 맞춘 적이 없다. 수입이 줄었으므로, 몇가지 계획이 변경되었다.

서울라이브 면접은 월요일 오후에 봤다. 1인당 6분의 인터뷰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다. 나는 6시 2분 면접이었다. 실제로는 시간표보다 10분쯤 뒤에 봤다. 윤병주씨는 단편선씨의 역할에 관해 물었다. 공백기에는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물음도 있었다. 용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듯한 지적도 있었고.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없었는데, 제대로 대답한 것도 없었다. 끝내고 나와 하카다분코에서 라멘을 먹었다. 노래 선생님을 마주쳤는데, 못 본 척 골목으로 도망쳤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공연 일자는 7월 12일 금요일, 공상온도에서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