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여러 사정으로 심히 우울했다. 문득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졌다. 멀쩡한 자취방을 두고 나와 선배 집에 들어갔다. 이미 한 녀석이 붙어살던 그 집은 좁기 그지없었다. 매일 알람이나 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설쳐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며칠에 한 번 집에 들러 옷가지를 챙겨 나왔다. 짐을 모두 들고나올 수는 없었으니까. 가끔 들린 집 두꺼운 요 위에 앉아 - 불 꺼진 방 창으로 드는 해를 보면서 -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요즘 밥맛도 없고 친구들도 그냥 그래요." 첫 문장과 멜로디가 나왔다.

영심이가 부르면 어울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당시 어울리던 여자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들은 주로 짝사랑이나 컴플렉스와 같은 것들을 얘기했다. 이리저리 가사를 썼지만 영 입에 붙지 않았다. 그 후 몇 년간 종종 꺼내어 불렀지만, 별로 나아지진 않았다.

《김일성이 죽던 해》 데모 제작을 하면서 다시 꺼내어 들었다. Verse만 남기고 모두 새로 썼다. 새 친구들의 이야기가 들어갔다. 친했던 친구와 별다른 이유 없이 ― 혹은 터무니없이 사소한 이유들로 ― 멀어진 이야기, 대상을 바꿔가며 이유 없이 따돌리곤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중학생 때 나는 이중적이었다.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을 말할 때마다 생겨나는 매연 같은 것을 맡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형들은 나를 때리고 뭔가를 뺏어갔다. 분하고 억울했다. 그래도 한편으론 세상에 좋은 것들이 있다고, 혹은 좋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후렴이 되었다.

"분더바"

분더바는 연희동 인근에 있던 카페다. 2014년, 임대차분쟁으로 농성 중인 분더바 앞에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분더바를 함께 되찾기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노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농성장에서 부르기 적당한 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만들면 어떨까? 분더바, 세 글자로. 마음속으로 운만 띄우고 만들지는 못했다.

궁중족발은 통인동 인근에 있던 식당이다. 2018년, 임대차분쟁으로 농성 중인 궁중족발에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현장잡지 맛동산'이 열렸다. 노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농성장에서 부르기 적당한 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만들면 어떨까? 예전에 생각만 했던 노래를. 그렇게 '분더바'가 나왔다.

현장에 있던 단편선 씨 - 그날은 본인의 세례명으로 노래를 했다 - 가 마음에 들어했다. 친한 친구 몇몇도 마음에 들어했다. 1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불렀다. 헬로루키 참가를 앞둔 때였다. 단편선 씨와 합정동에서 ― 간장으로 맛을 내 색이 검었던 ― 라멘을 먹었다. 중학생과 분더바를 묶어 내기로 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프로듀서 단편선 씨를 꽤 오랫동안 존경해왔다. 두리반 투쟁이 한창일 때, 나는 고민 많은 지망생이었다. 현장에서 노래하는 그가 하나의 해답처럼 보였다. 전역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그가 운영위원을 맡고 있던 조합에 가입한 것이다. 단편선 씨의 프로듀싱 아래 현장에서 부르던 노래를 발표하는 것은 그래서 어쩐지, 소설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차고 화가 줄었다. 사실을 아는 것이 귀찮아졌다. 사장이 된 친구들이 ― 그들은 언제나 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 늘었다. 두 번의 재개발로 두 번의 이사를 했다. 분노가 맡아 둔 자리엔 부러움이 들어섰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엔 높은 건물이 들어섰다. "그래도 멋은 있더라", '10년 전의 나'와 착잡함을 나눈다. "이제는 누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역하게 느껴진다.

실은 알고 있으니까.

"뮤직비디오"

프로듀서는 운동부 학생들의 모습을 담고 싶어 했다. 대학 후배에게 부탁해 청주의 한 탁구부를 섭외했다. 촬영 하루 전 사정이 생겨 로케이션이 취소되었다. 발매가 며칠 안 남은 때였다. 뮤직비디오를 찍을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나는 찍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프로듀서는 '그래도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입장. '알아서 하기로' 하고 배우 모집 공고를 올렸다.

나는 항상 뮤직비디오가, 드는 품에 비해 소득이 적다고 생각해왔다. 터무니없이 적게 잡아도 최소 50만 원 이상의 노동 ― 비용이 아니다 ― 이 투여 된다. 5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렇지만 50만 원으로는 TV에서 흔히 보는, 별 대단할 것도 없는 뮤직비디오조차 만들기 어렵다. 널리 알려진 해결책은, 사람을 갈아 넣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대단한 영상을 만든들, 내게 큰 변화가 찾아올까? 전혀 아니다.

품과 소득의 비율을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맞추고 싶었다. 관건은 최대한 적은 컷을 짧은 시간 동안 촬영하는 데 있었다. 중학생이 걷는 모습을 3(에서 5)회 찍자. 아침엔 일어나기 힘드니까 오후에 찍자. 5시면 해가 지니까 3시쯤 찍자. 어두워지면 적당히 마치자. 원하는 그림을 찾아 감독에게 보내줬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 씨가 걷는 모습이었다. 영화에서는 몇 초지만 우리는 7분 동안 걷기로 했다. 원테이크에 가까워질수록 편집이 줄어드니까.

1월 2일, 12시 반쯤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감독을 만났다. 차를 대고 장소를 물색했다. 청운중학교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의 언덕길이 가장 좋았다. 구도와 비율, 시작과 끝을 정했다. 2시 반쯤 이번 뮤직비디오의 주연배우인 김이슬 씨를 만났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이슬 씨는 촬영을 위해 아산에서 어머님과 함께 올라왔다. 3시쯤 사진작가 겸 디자이너인 소라 씨를 만났다. 소라 씨의 작업에 '좋아요'만 열심히 누르다, 이번에 용기 내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

이슬 씨는 검은 더플코트를 입고 왔다. 옷장에도 없고 주변에서도 찾기 힘들다하여 직접 구입해 보냈다. 소라 씨가 챙겨온 파란 목도리와 백팩을 멨다.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몇 번의 예행연습을 했다. 주머니의 손 꽂는 모양을 살짝 교정했다.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이 끝났다. 인건비를 지급하고 향후 계획을 공유했다. 해산 시각 4시 반.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담았다. 감독은 나를 "타협하는 음악가"라며 놀렸다. 잘 타협한 것 같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